사랑으로 충만한 세상을 꿈꾸며
Master Class [ Ray YEUNG ] Commentary
정체성은 단수형이 아니다. 성별과 인종과 머무는 지역과 가족 내의 역학 관계와 개인을 둘러싼 환경의 조건 등등이 작용하는 방식에 따라 복잡한 양상을 띤다. 레이 영 감독의 작품이 흥미로운 건 아시아 성소수자로, 아시아에서 성소수자로 산다는 것의 현재를 보여주고 있어서다. 홍콩에서 나고 자란 레이 영은 청소년기를 영국에서 보냈고 지금은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활동하고 있다.
자신이 살아온 공간과 성장의 궤적에 맞춰 네 편의 장편 영화를 만들어 온 레이 영의 작품은 일종의 로컬 형식을 띠는 기존의 퀴어물들과 다르게 상대적으로 국제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어느 하나의 요소에 치우치지 않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받아들인 레이 영의 작품 세계는 그래서 익숙한 퀴어물의 껍질 속에 무지개처럼 다양한 함의의 알맹이를 품고 있다.
차이를 결합하다
레이 영의 두 번째 장편 <프론트 커버>(2015)는 뉴욕에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는 중국 이민자 출신의 라이언(제이크 최)과 해외 활동을 위해 미국에 온 중국인 닝(제임스 첸)의 관계가 중심에 선다. 둘은 겉으로 중국인의 외양을 가지고 있어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고 활동한 까닭에 사사건건 부딪치며 ‘차이’를 보인다. 레이 영의 작품’들’이 그렇다. 차별을 다루기보다 차이에 주목해 게이씬에서의 여러 문제와 현상을 공론화한다.
레이 영은 영국 유학 시절 기숙 학교에서 지내면서 차이를 인식하기에 앞서 차별을 경험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백인이었고 나만 아시아인이었다. 차별이 심했다. (중략) 이들과 함께하려면 중국적인 것과 거리를 두어야 했다. 아시아 게이와는 어울리지 않아야 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백인 남성과 데이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덜 외부인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주류 게이 커뮤니티에 들어가는 티켓이었다.”
영국에서 생존(?)하기 위한 레이 영의 경험은 <프론트 커버>의 라이언에 반영되어 있다. 로맨스에 한정하지 않고 직업과 가족까지 그 폭을 넓혀 중국과 미국, 동양과 서양 등의 이분법적 고정관념을 넘어 백인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세계에서 아시아인 성소수자 남성이 처한 이슈 전반을 아우른다. 라이언은 아시아 남성에 관심이 없다면서도 닝의 스타일리스트 업무를 따내려 환심을 사기에 바쁘고, 그와 동등한 계급을 맞추려 부모 직업을 속이기도 한다.
성적 욕망에 더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더 나은 사회적 계급을 향한 바램은 라이언과 같은 특정한 이들에게만 주어진 게 아니라 모든 이들이 갖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산다는 것의 본질은 누구나 같아도 개인의 스펙트럼에서 삶이 다양한 것은 추구하는 방식에 각자의 차이가 있어서다. 레이 영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영화에 다양한 층위를 설계하면서도 차별 운운하는 메시지로 호전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레이 영은 감독 외에도 흥미로운 전업과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영화 작업을 하지 않을 때면 홍콩 레즈비언 & 게이 영화제(HKLGFF)의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프리랜서 각본가와 편집자로 자신의 영화 외의 업무에도 참여한다. 또한, 변호사로 2년 동안 근무한 적도 있고,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래서 레이 영은 홍콩 영화계에서 독특한 감독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홍콩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고 여러 가지 직업을 받아들인 감독답게 레이 영은 차이를 재료 삼아 결합하는 방식으로 영화 세계를 구축했다. 장편 데뷔작 <컷 슬리브 보이스>(2006)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릭터를 게이로 변주한 듯한 두 친구 멜빈(스티븐 림)과 애슐리(초위 레오) 각각의 연애사로 런던에서 삶을 즐기는 아시아인 성소수자를 바라본다.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채지 못하면 <컷 슬리브 보이스>는 아시아적인 요소를 감지하기 쉽지 않다. 제목은 한나라 황제와 첩으로 둔 소년의 사연에서 가져온 것으로, 황제는 자신의 팔에 잠들어 있는 소년을 보고 그 사랑을 증명하려 옷의 소매를 잘랐다. 레이 영은 중국의 옛이야기를 가져와 이를 현대 런던의 아시아 성소수자의 삶과 결합한다. 게이의 사랑은 국적이나 인종이나 문화의 차이에 상관없이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가족도 중요하다
“부모님이 원해서 했을 뿐이다.” 앞서 레이 영이 법학을 공부했다고 언급했는데 실제로는 법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부모의 의지가 아들의 미래의 일부를 강제로 가져간 셈인데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극적인 드라마가 생기거나 새로운 사건은 없었다. 부모님은 매우 전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내가 영화로 아무리 많은 상을 받더라도 내 직업에 대해 의사나 변호사만큼 좋아하지 않을 거다”.
웃으며 가족 일화를 밝히지만, 가족 구성원을 향한 뒤틀린 방식의 애정은 홍콩을 배경으로 한 <아저씨 x 아저씨>(2019)와 <모두 다 잘될 거야>(2024)에서 주인공을 힘들게 하는 주요한 요소다. <아저씨 x 아저씨>에는 자식들이 반발할 것을 우려해 성정체성을 밝히지 못하는 70대 아저씨 커플이 등장하고, <모두 다 잘될 거야>의 노년의 여성은 유서도 남기지 않고 사망한 파트너 때문에 집을 두고 사이좋게 지냈던 유족과 권리 싸움을 벌인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의 성정체성 때문에 가족과 갈등하거나 대립하는 양상을 중요한 서브 텍스트로 삼고 있어도 그걸 보여주는 레이 영의 연출은 과격함과 거리를 둔다. <모두 다 잘될 거야>의 앤지(파트라 어)는 팻(린린 리)의 유족과 법적 싸움을 불사하면서도 왕래마저 끊지 말자며 가족의 연을 소중히 여긴다. <아저씨 x 아저씨>의 연인 팍(타이 보)과 호이(벤 유엔)는 성정체성 때문에 가족과의, 아들과의 관계를 망칠까 매사 신중하다.
<모두 다 잘될 거야>는 홍콩에서의 동성 결혼에 관한 이슈를 부각해 좀 더 진보한 미래로 나아가기를, <아저씨 x 아저씨>는 가족과 자식에게 헌신한 아버지들이 이제는 삶을 즐겼으면 하는 감독의 마음이 담겨 있다. 성소수자의 권리 찾기가 중심에 서는 영화를 만들면서도 레이 영은 보편적인 가족의 유대감에 대해서도 그 못지않게 비중을 두어 둘의 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소수자가 원하는 삶의 형태는 그들만의 싸움에 국한하지 않고 울타리가 되어주는 가족의 존재도 중요하다는 건데 레이 영은 이를 영화로 구현하는 데 있어 <결혼 피로연>(1993)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미국 영주권이 필요한 딸이 게이 신랑과 위장 결혼을 하면서 통제 불능의 상황이 벌어지는 <결혼 피로연>에 관해 “서양의 아시아 가족 이야기로 많은 관객의 공감을 산 이안의 영화를 보면서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아저씨 x 아저씨>와 <모두 다 잘될 거야>에서 레이 영이 직접적으로 끌어들이는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953)다. 노부부가 자식들을 보려고 도쿄로 상경하는 <동경 이야기>에서 노부부의 뒷모습은 많은 사연과 감정을 담아낸다. <모두 다 잘될 거야>는 좋았던 한때를 보냈던 앤지와 팻의 뒷모습으로 시작하고 <아저씨 x 아저씨>는 <동경 이야기> 속 구도를 가져와 강변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팍과 호이의 등에서 여러 가지 감정을 포착한다.
선배 영화를 모티브 삼거나 오마주하여 작품을 완성하는 방식은 ‘결합’을 이야기 직조의 수단으로 삼는 레이 영의 특징이다. 다만, 레이 영은 이들의 작품이 추구하는 메시지와는 다른 목소리로 자기화한다. 오즈와 이안의 작품이 도시화, 세계화와 같은 ‘변화’하는 세상을 포착한 가족 풍경화라면 레이 영은 성소수자를 둘러싼 편견과 차별을 바로잡고 그들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봐달라며 ‘변화’를 촉구한다.
퀴어물이 더 필요하다
“이들 커플은 자신들의 상황을 가족들이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가족과 오랜 시간 관계를 유지해 왔고 법적으로 다투지 않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에 이들이 돌봐줄 거라고 예상했다. 제목을 ‘모두 잘 될 거야’라고 지은 이유다.” <모두 다 잘될 거야>의 앤지가 동반자였던 팻과 함께 살았던 집을 지키기 위해 가족의 인정과 동정에 기대는 대신 법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처럼 레이 영은 영화로 성소수자의 당연한 권리를 말한다.
그것이 레이 영이 퀴어물을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다. “홍콩에는 많은 영화가 있지만, 게이 영화는 많지 않다. 알다시피 LGBTIQ+ 커뮤니티에서도 ‘게이’는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우리의 삶은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복잡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갈 길이 아주 멀다. 내가 보기에 홍콩의 LGBT 영화는 아직 초기 단계다. 우리에게는 LGBT의 사연을 이야기로 전달할 수 있는 더 많은 감독이 필요하다.”
레이 영의 인터뷰는 성소수자를 중심에서 밀어내는 세상을 향해 싸워보자는 선전포고가 아니다. 세상은 흑백 이분법의 논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레이 영은 흑과 백 그 사이에 우주의 별만큼 무수하게 존재하는 다양한 소수자와 사연에서 세상과 불화하는 차이를 발견하고 이에 기반한 인물의 감정을 공론화하여 많은 이가 공감할 이야기로 선보인다. 거기에는 비록 낭만도 없고, 완벽한 화해도 없고, 해피엔딩도 없지만, 사랑을 기반으로 한 관계가 있다.
레이 영이 만든 네 편의 장편 영화는 인물도, 공간도, 사연도, 사회적 환경도 대부분 달리 가져가지만, 공통으로 존재하는 게 있다. 사랑이다. 레이 영의 영화에서 사랑은 하룻밤에 그칠 때도, 맺어지지 못할 때도, 인정받지 못해 숨겨야 할 때도, 상실감에 처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순간만큼 진짜이고 진실할 때가 없다. 차이를 인정하고 결합할 때 거기에는 사랑이 생겨난다. 레이 영은 지금보다 더 사랑으로 충만한 세상을 꿈꾼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은 그럴 때 찾아온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